설악산은 역시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지난 8월 중순(정확히 8.8-8.13)에 네 자매가 뭉쳐 설악산 일주 탐방한 이야기이다.
난 네 명 중 둘째인데, 명색이 대학교수라는 막내동생이 아직 그 유명한 설악산을 가 본적이 없다고 해서 식자 '촌놈' 딱지 떼는 셈치고 네 자매 단합도 할 겸 용감하게 길을 나섰던 것이다. 여기서 용감하게라는 말을 한 것은 나름 이유가 있다. 체구가 제일 작은 언니도 당차게 걷는데, 바로 밑의 동생은 500 미터 걷고 쉬어가야 하는 물탱이에 엄살도 약간 있어서 평소에도 걷기나 등산이라면 미리 겁부터 내는 사람이라, 민족의 대 성산인 설악산(1710m) 등정은 감히 입도 벙긋할 수 없는 '큰 일'이었고, 또 아무리 씩씩하다고 해도 나이께나 든 여자들이 선뜻 나서기에는 어딘가 두려운 존재가 설악산 아닌가? 어쨌거나 용감한 우리의 설악산 일주 탐방은 백담사-봉정암-대청봉-천불동계곡-비선대-소공원의 코스를 2박 3일의 일정으로 성공리에 끝났다.
날씨는 이 즈음에 태풍이 블어 중부지방과 남부 일대는 강풍과 폭우로 난리통이었는데, 하늘이 우릴 도우셔서 강원도 설악동 쪽만 약간 흐렸다 갰다 하면서 산행하기에는 더 없이 좋았다. 다만 봉정암에서 대청봉 오르는 구간은 바람이 매우 강하게 불어 대청봉 정상에선 우리 네 자매의 스타일은 바람맞은 여인들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표정 하나만은 죽여주게 명랑하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 본다.
* 에피소드 1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봉정암 오르기 직전의 소위 '깔딱고개'는 평탄하고 아기자기한 계곡길을 즐겁게 오르다가 맞이하는 가장 힘든 구간이다. 유난히 잦았던 비로 인해 산사태의 조짐이 보이거나 붕괴 위험이 느껴지는 곳이 더러 있었지만, 관리가 잘 되어 있어 무사히 오를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은 그야말로 거북이 걸음으로 쉬엄쉬엄 오르는데, 60대로 보이는 여자 두 분이 숨을 헐떡이면서도 우리를 앞질러 청년 걸음으로 오르신다. 고개 정상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데, 그 중 한 분이 느닷없이 땅에 엎드려 큰 절을 하시는 것이다. '산신령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무사히 올라왔습니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나도 얼떨결에 고개를 숙이고 감사한 마음을 가졌다. 그 분은 매주 1회 봉정암에 오시는데, 지난 주에는 일이 있어 2주 만이고, 그게 벌써 몇 년째란다. 건강이 좋지 않아 시작한 일인데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건강이 좋아진 결과가 아닐까? 지금 생각해도 참 존경스럽다.
* 에피소드 2
무슨 일을 하든 준비가 있으면 근심이 없는 법인데, 준비를 하느라 해도 미처 헤아리지 못한 부분이 있어서 이번 산행에서 낭패를 당할 뻔한 일이 있었다. 걷기를 두려워하는 동생에게 일어난 일. 별다른 등산 장비는 없어도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잘 챙겨왔는데, 문제는 오래된 등산화. 많이 신지 않아 겉으로 보기에 멀쩡하던 신발이 대청봉 정상에서 중청대피소로 하산하는 길에 몸체와 바닥이 분리되어 버린 것이다. 발도 편하고, 그 당시 돈을 좀 주고 산 것이라 신을만하다고 생각하여 이런 일을 당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런 일을 당하기 전에는 누구나 다 그럴 것이다. 다행히 중청대피소에서 친절하신 직원의 도움으로 비상용 신발을 빌릴 수 있어서 위기는 모면했지만, 갈길은 멀고 몸도 지치는데 가장 중요한 신발이 그렇게 되었을때 본인의 마음은 어땠을까? 정말 기막히고 아찔한 순간이었다. 혹시 먼길, 높은 산을 오르실 분들은 신발 점검을 한번 더 하고 가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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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P 동생이 많이 지쳐서 예정에 없던 양폭대피소에서 1박을 하게 되었다. 아무런 준비없이 되는대로 조달하여 하룻밤을 지냈다. 그런데 대피소 테라스에서 계곡물소리 들으며 커피 한잔으로 모처럼 여유있는 저녁시간을 보내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이런 걸 두고 전화위복이라 하는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별을 찾느라 고개 아픈 줄 모르고, 매트와 담요 한장으로도 그리 불편하지 않은 즐거운 하룻밤이었다. 설악산 국립공원에서는 비누, 세제 등의 사용이 일체 금지되어 있어, 계곡에 발을 담그고 머리와 얼굴을 대충 물에 적셔 씻는둥 마는둥 했지만 그것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대피소에서는 사용한 그릇을 씻을 때도 종이로 먼저 닦아낸 후 계곡 물에 그냥 씻어야 한다고 소장님이 일러준다. 잠시 불편해도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이니 다른 곳에서도 똑같이 지켜졌으면 좋겠다. 실제로 그렇게 하니 오히려 더 편하고 좋은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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