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크라센(S. Krashen)의 모니터 이론과 5대 가설
크라센은 1977년 제 2언어 학습과 관련하여 모니터 이론(Monitor theory)을 발표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5가지 가설을 제시하였다. 일명 모니터 장치가설로도 불리는 모니터 이론은 외국어 학습이론 중 생득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언어의 습득과 학습을 독립적인 별개의 과정으로 구분함으로써 외국어 교수-학습이론에 큰 영향을 주었다. 모니터 이론의 5대 가설은 습득-학습 분리 가설, 모니터 가설, 자연 순서 가설, 입력 가설, 정의적 필터 가설인데, 이들 가설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습득-학습 분리 가설(The Acquisition-Learning Distinction Hypothesis)은 크라센의 이론 중에서 가장 토대가 되며 널리 알려진 가설로서, 말 그대로 언어를 ‘습득’하는 것과 ‘학습’하는 것은 다른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습득은 자연스러운 의사소통, 즉 목표어와 의미 중심 상호작용을 함으로써 이루어지는 무의식적 과정으로서 제 1언어(모국어)를 습득하는 것과 유사하다. 반면 학습은 교실과 같은 인위적인 언어 학습 환경 속에서 의도적으로, 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이며, 전자가 언어의 의미 중심이라면 후자는 다분히 언어의 형식에 중점을 두고 언어 규칙 등을 배우는 과정에 해당한다. 크라센에 따르면, ‘습득’이 ‘학습’보다 더 중요하다. 다음은 크라센이 구분한 습득-학습의 차이점이다.
습득 |
학습 |
내재적, 무의식적 |
노골적, 의식적 |
자연스런 상황 |
인위적인 상황 |
감정 문법 사용 |
규칙 문법 사용 |
태도 의존 |
적성 의존 |
일정한 습득 순서 |
단순→복잡 학습 순서 |
모니터 가설(The Monitor Hypothesis)은 감시자 가설이라고도 하는데, 학습의 기능을 ‘감시자’에 비유한 것이다. 아무리 학습해도 학습 그 자체는 언어를 습득하는 것과는 무관하며, 습득을 통한 의사소통을 할 때 화자 스스로 자신의 발화를 감시하여 오류를 찾아내고 수정해 주는 기능만 한다는 것이다. 감시자 기능을 위해서 필요한 세 가지 조건으로 시간, 형식에 대한 화자의 초점, 문법규칙에 대한 지식을 제시하였다. 즉 학습자가 해당 규칙을 잘 알고 내용보다는 형식의 정확성에 초점을 두면서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갖고 해당 규칙을 참조할 때 자신의 언어에 대한 모니터링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자연 순서 가설(The Natural Order Hypothesis)은 문법규칙 습득에 있어서 일정한 순서가 존재하며, 이 일정한 순서는 학습에 의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정한 순서를 앞질러 학습하더라도 학습자는 학습한 문법 내용을 자연 발화에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낼 수가 없다.
입력 가설(Input Hypothesis)은 5가지 가설 중 가장 핵심적인 가설로서, 성공적인 외국어 습득을 위해서는 반드시 충분한 분량의 이해가 가능한 입력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해 가능한 입력’은 학습자의 현재 언어 능력보다 한 단계 높은 수준의 ‘듣기’ 활동을 의미한다. 충분히 들어야만(입력) 말하기(출력)가 가능하다는 논리이며, 말하기 연습이나 훈련은 따로 필요치 않고 일정 기간(침묵기) 동안 충분한 입력 과정을 거치면 학습자는 내재화를 통해 자연스런 발화를 하는 시점에 이른다.
마지막으로 정의적 필터 가설(The Affective Filter Hypothesis)은 학습자 개인의 내적 상황이나 여건이 언어 습득에 영향을 준다는 가설이다. 즉 이해 가능한 입력이 아무리 많아도 학습자의 걱정, 불안감, 자신감 결여, 동기 및 흥미 부족 등 심리, 정서적 요인에 의해 차단되고 걸러지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성공적인 학습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정의적 필터를 최대한 감소시키거나 제거한 상태에서 입력이 주어져야 외국어를 가장 잘 습득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2. 5대 가설의 장점과 단점
이상에서 살펴본 크라센의 모니터 이론 5대 가설이 실제 외국어 교육 현장에 기여한 장점과 아울러 아쉽고 미비하다고 생각되는 점은 무엇인지 나름대로 의견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첫째, 습득-학습 분리 가설은 외국어 습득에 있어서 선천적인 언어 습득능력 이외에 학습의 필요성을 확인시켜 주었다. 언어를 유창하게 사용한다고 해서 문법 규칙이 반드시 올바른 것은 아니므로, ‘습득’된 언어의 유창성은 ‘학습’을 통해 정확성을 보충할 수 있다. 모든 언어 - 제 1언어(모국어)와 제 2언어(모국어 이외의 언어, 또는 외국어) 등으로 구분하지 않더라도 - 는 의사소통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습득되어야 하며, 이 습득 과정은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생득적 언어 활용 기능이 수행되는 과정으로, 언어 형태가 달라도 인간은 누구나 특별한 학습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언어 사용이 가능하다는 점을 명시한 것이다. 하지만 크라센의 주장처럼 80%의 습득과 20%의 학습 과정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으며 학습의 범주를 어떻게 정하는가의 문제가 생긴다. 크라센은 주로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학습을 예로 들고 있다. 하지만 교실에서 인위적으로 행해지는 학습만 학습으로 인정하기는 부족하다. 습득은 하루 아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지속적으로 언어 능력을 키워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습득 과정 속에서 교실 수업 이외의 다양한 학습 과정이 병행되거나 학습의 결과가 지속적으로 추가된다. 즉 자연스런 습득 과정에서 은연중에 크고 작은 학습이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학습의 연속선 위에 습득의 결과가 지속적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편이 더 옳을 수도 있다. 이것은 외국어 습득뿐만 아니라 모국어 습득과정에서도 가정할 수 있는 일이다. 습득된 언어 능력은 어떤 방식으로든 학습의 결과와 분리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습득-학습 분리 가설은 습득과 학습의 범주를 명확하게 구분하여 제시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다만 성인 학습자의 경우에 한하여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학습 그 자체는 습득과는 별개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학습을 했지만 실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이런 경우 학습은 있어도 습득되지 않았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둘째, 모니터 가설은 학습된 결과로서의 언어가 습득 과정에서 참여하여 기능한다는 점을 설명해주는 장점이 있다.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든 실제 학습을 전혀 배제한 상태에서 언어를 제대로 습득하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습자의 학습 내용이 모니터의 기능을 한다는 것을 확인하기가 어렵다. 또한 오류를 찾아내어 수정하는 것은 물론 새로운 요소를 추가하여 습득 과정을 유지, 발전시키는 능동적 역할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만약 오류만을 찾아 수정하는 기능만 한다면, 정확하고 유창하게 의사소통을 하는 학습자들에게 더 이상 학습은 필요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모국어 화자들에게서도 더 이상 학습이 필요 없을 정도의 언어 구사력을 과연 기대할 수 있을까? 그리고 학습자가 오류 없는 언어를 구사할 때, 그것이 습득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학습자의 모니터링이 기능한 것인지, 그렇다면 정확하게 어떤 것을 모니터링 하였는지 등을 확인하기가 어렵다. 또한 모니터링의 3가지 조건 중에서 ‘시간’은 아무리 많이 주어져도 말하기의 특성상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정상 속도의 의사소통 과정에서는 모니터링이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만약 부지불식간에 거의 완벽하게 모니터링을 하는 수준이라면, 그것은 이미 습득된 것이고 더 이상 학습의 모니터링이 필요 없는 단계일 수도 있다. 다만 ‘쓰기’ 에서는 말하기보다는 모니터 기능의 결과를 확인하는 일이 비교적 더 가능할 것이다.
셋째, 자연 순서 가설은 ‘모든 일은 순리대로 행해진다’는 점에서 언어 규칙 습득의 일정한 순서 혹은 자연스런 순서가 존재함을 설명할 수 있다. 말하자면 어떤 언어 규칙이 습득되면, 그 다음 순서는 학습에 의해 인위적으로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고 분명 이미 습득된 지식과 관련된 새로운 규칙이 화자의 무의식적 의사소통 욕구에 따라 자연스럽게 바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학습 순서와는 무관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랜 기간에 걸쳐 습득되는 모국어와는 달리 일정한 기간에 집중적으로 학습을 통해 외국어를 습득하여 정확하고 유창하게 목표어를 구사하는 외국어 화자의 경우, 규칙을 습득한 순서가 반드시 자연 순서에 따른 것인지, 또는 학습 순서가 자연 순서와 일치한 것인지, 그렇다면 정확한 자연 순서는 어떤 것인지를 기술해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크라센은 자연적 순서가 학습 순서와 무관하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만약 자연적 순서와 학습 순서를 일치시키면 학습과 습득이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자연적 순서는 모든 언어, 모든 화자에게 동등한 것일까? 모든 언어에서 일정하다면 그것은 일상의 의사소통에 필요한 언어의 의미 측면이지 (문법적) 형태 측면은 아닐 것이다. 화자에 따라 다르다면 이는 결국 학습의 순서에 기인하는 것은 아닐까? 언어 습득의 보편적인 자연적 순서가 존재한다면 어떤 모델을 제시해야 할 것인데, 크라센은 이런 점들을 명백하게 밝히지 못한 것 같다.
넷째, 입력가설은 ‘입력이 있어야 출력이 가능하다’는 간단한 논리를 확인해 준다. 그리고 입력이 부족하면 언어 습득은 지연되고 몰입교육은 ‘이해 가능한 입력’을 제공할 수도 있다는 것도 명시하였다. 크라센은 화자마다 언어 능력의 수준이 다르므로 ‘자연적 의사소통을 통한 입력’이 자신의 ‘이해 가능한 입력’을 확인시켜주는 열쇠라고 제안했다. 즉 외국어 화자는 자신의 ‘이해 가능한 입력’을 의사소통 과정에서 스스로 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이해 가능한 입력을 자연 순서에 따라 수용함으로써 자신의 언어 능력을 향상시키고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하지만 그 ‘이해 가능한 입력’을 명확하게 기술하지 못했다. 또한 몰입교육을 통한 ‘이해 가능한 입력’의 경우, 개인의 언어 능력을 측정하는 방법도 쉽지 않다. 자연적 의사소통 과정에서 개인의 언어 능력을 감지하더라도 결국은 학습을 전제한 수준 구분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아니면, 무작정 많은 입력을 제공하고 개인이 능력에 따라 자연 습득할 때까지 마냥 기다려야 한다. 그래도 무엇이 이미 습득된 것이고 무엇이 습득 가능한 입력인지를 명백하게 가리는 것은 쉽지 않다. 모든 화자가 과연 ‘i+1’에서 자신의 ‘i’와 ‘1’이 각각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을까?
다섯째, 감정 필터 가설은 일종의 학습동기 또는 흥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데, 언어 습득 과정에서 감정 필터는 ‘이해 가능한 입력’을 수용하고 차단하는 일에 참여함으로써(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제 2언어 습득에 영향을 준다는 점은 충분히 가능하고 실제로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가설 또한 감정이 어느 정도로 필터 역할을 하고, 그 결과 언어 습득에 어느 정도 차이를 가져오는 지를 정확하게 기술지 못했다는 단점이 있다. 또한 언어 습득 과정이 비교적 장기간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학습자의 감정 필터가 때때로 작동한다 하더라도 장기간에 걸쳐 꾸준히 일정하게 지속적으로 입력을 방해하지 않는 한 크게 영향을 주지 않을 수도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크라센의 모니터 이론의 5대 가설은 제2언어 습득과 관련하여 무의식적인 습득과정과 의식적인 학습과정을 구분함으로써, 외국어 습득 이론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5대 가설 모두 논리적으로 타당하고 이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리고 습득과 학습의 개념을 분리하여 기술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문제점들을 보완하기 위해 제2, 제3의 가설들이 덧붙여진 것 같다. 다만 크라센의 이론은 외국어 학습자에게 제 2언어가 입력되어 습득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기술하지 못하였으므로 그 과정을 확인할 수 없다. 이러한 무의식적, 생득적, 비가시적인 과정과 절차 등이 소위 말하는 ‘심증’은 충분한데 부분적으로 ‘물증’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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