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생각하는 멋

더글라스 케네디의 <모멘트>

unibelle 2011. 11. 29. 10:48

더글라스 케네디의 <모멘트(The Moment)>

   조동섭 역, 밝은 세상, 2011

 

 

1. 인물 보기

 

토마스 네스비트(남) : 화자. 미국인 작가. 베를린 여행기를 쓸 목적으로 베를린 체류 중 페트라를 만나 사랑에 빠짐. 부모의 불행한 결혼생활에 상처받은 어린 시절, 연애와 결혼에 모두 실패한 과거의 아픈 기억속에서 자조적인 삶을 영위함.

 

페트라 두스만(여) : 토마스의 연인. 동독 출신 번역가. 순탄치 못한 결혼생활이 남편의 죽음으로 끝나고 아들을 인질로 잡힌 상황에서 강요된 대 서독 스파이활동 중 토마스를 만나 사랑하게 됨. 죽은 후 자신이 남몰래 써 둔 일기 노트를 아들을 통해 옛 연인에게 전달함으로써 자신의 진실을 밝힘.

 

 

2. 작품의 배경 및 구성

 

  통일 이전의 독일. 베를린 장벽을 사이에 두고 동·서독이 대립하고 있는 1980년대. 미국과 소련의 동·서 냉전시대가 거의 종말을 고하기 직전, 미국이 서독에 첩보망을 구축하고 붕괴 직전의 불안한 상황에 처한 동독의 악랄한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깨어진 장벽의 틈새로 와해를 위한 물을 흘려 넣고 있던 시점이다.

 

  책은 모두 5부로 나뉘어져 있다. 제1부는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미국인 작가(화자, 나)가 이혼 직전의 혼란한 상황에서 독일  베를린 발신 우편물을 수령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우편물은 과거 베를린 체류 시에 만나 사랑에 빠졌다 결혼을 앞두고 동독 스파이임이 드러나면서 헤어진 여자의 일기가 적힌 노트인데, 여자의 유언을 받들어 아들이 보내온 것이다. 제2부는 작가로서의 화자가 미국에서 호평을 받기 시작할 즈음 잡지사의 후원으로 베를린 기행문을 쓰기 위해 베를린에 거주하면서 페트라를 만나기까지의 과정이 들어있다. 제3부는 화자와  페트라의 관계, 연인관계를 유지하다 결혼 직전에 스파이임을 알고 헤어지기까지, 두 사람의 관계에 거의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제4부는 페트라의 노트에 적힌 내용, 제5부는 페트라의 아들에 대한 연민과 이혼으로 양육 책임을 지게 된 자신의 딸에게 사랑을 쏟으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3. 책에 대하여

 

  책의 내용을 두루 반추해보면 화자인 미국인 작가 토마스 네스비트는 작가로서의 입장에서 본다면 저자 자신이 모델이 된 것 같기도 하다. 저자 더글라스 케네디는 앞의 두 작품(빅 픽처, 위험한 관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중년의 이혼에 대한 아픔과 아들을 둔 엄마로서의 여자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책의 대부분을 할애한 페트라 두스만과의 생애 단 한번 경험하기도 어려운 '진정한 사랑'과 그것을 이루지 못한 회한에 비중을 둔다면 실현되지 못한 러브스토리일 수도 있겠지만, 이 작품은 단순한 연애소설은 아니다. 화자의 삶 전체를 조명해 볼때 이 한순간의 불같은 사랑도 순간에 불과하고 지속적으로 그의 삶을 지배하는 기억들은 모두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 대한 회의와 의문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만남도 그렇고, 자신이 만나는 여러 여자들 - 몇 번 만나고 헤어지는 경우도 있고, 얼마간은 함께 살고 싶었던 여자도 있고, 결혼하여 함께 살기도 했던 여자도 있다 -과 동성애에 빠진 예술가의 삶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순탄하거나 원만하지 못하고 결국 불행으로 끝이 난다. 그게 바로 중년을 넘긴 한 남자가 경험한 삶이라는 것임을 말하는 것일까?

 

  어린 시절 부모의 불화로 가슴앓이를 했지만 젊은 시절 야심찬 작가로서 힘찬 발걸음을 내디딜 때의 토마스와 이제 스무 살을 훌쩍 넘긴 두 아이를 바라보는 중년 남자로서의 화자 사이에 수많은 시간과 일들이 점철되어 있다.

 

 '동독에 섬처럼 떠 있는 도시, 20세기의 상반된 이념이 서로 맞닿아 있는 도시, 무정부주의의 도시, 양분된 도시, 바이마르 공화국의 데카당스 흔적을 자랑스러워하는 도시, 그러면서도 변방의 한가운데에 있고 싶은 아웃사이더들을 끌어들이는 힘을 가진 도시, 드러나거나 숨은 과거를 지닌 대도시의 현실감을 갖춘 도시, 흑백의 황량한 공산주의와 날마다 어깨를 비비는 도시...'

 

'...하지만 지금의 자신을 존재하게 만든 과거의 이야기를 바꿀 수는 없다. 복잡한 인생의 순간순간이 수없이 모여 이루어진 이야기, 즐거움과 두려움, 의욕과 무기력, 빛과 어둠,'

 

'그동안 살면서 겪은 일들이 모여 존재하는 게 인간이다. 그리고 우리 인간은 그 모두를 짊어지고 살아가야 한다. 우리에게 결핍된 것, 간절히 바랐지만 결코 손에 넣을 수 없었던 것, 전혀 바라지 않았지만 결국 가지게 된 것, 찾아내고 잃어버린 것, 그 모두를.'

 

 

  이야기 속에는, 화자가 베를린에서 세들어 살게 된 집에서 아래 위 층으로 함께 사는 알스테어라는 화가에 대한 묘사가 비교적 상세하게 나온다. 베를린에 거주하면서부터 베를린을 떠날 때까지 토마스의 생활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면서 마약과 동성애라는 인간 최대의 난제를 아무런 거리낌없이 실천하는 예술가.

미국 사람, 정확히 말해 미국 남자의 시각에서 토마스는 알스테어에 대해 처음에는 단순한 동거인(독립된 공간)으로서의 무관심을 보이다가, 때로 이해하지 못할 기행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간적 진실성과 예술가로서의 고뇌를 이해하면서 그의 삶을 존중하게 되고 친구와 같은 연민과 우정을 느낀다. 결국 끔찍한 통과의례를 치른 후에 마약과 동성애로부터 알스테어를 끌어내어 보통의 세상 밖으로 내 보내는 작가의 따뜻하고 착한 마음이 없었다면, 난 이 사람에 대해 아직도 의문이 남았을 것이다. 이 이야기 속에 이 사람의 등장 이유는 무엇인가? 하고. 암울한 시기의 불확실한 삶의 고뇌를 창작활동으로 승화하고자 애쓰는 예술가의 초상은 바로 그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자포자기에 가까운 생활의 정점에서 나락으로 굴러떨어진 후, 그 고통을 감내하면서 다시 새로운 인생을 향한 전환점에 선 알스테어의 모습은 베를린의 어제와 오늘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듯 싶다. 즉 알스테어는 낯선 베를린에서 토마스가 베를린 사회의 참모습을 알게 되고 베를린 생활에 적응하도록 만들어 주는  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화자의 연인 페트라 두스만의 에피소드를 보면 <위험한 관계>의 샐리 굿차일드가 떠오른다. 작가는 여자의 모성 본능에 충실하다. 정말이지 우리 생활 주변에서 너무도 자주 보는 상처뿐인 모성애를 이 작가만큼 리얼하게 묘사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남편의 밀고, 아들의 납치, 고문의 끝에 강요된 스파이 임무 등의 파란만장한 삶 속에서도 오직 '아들'을 되찾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굳세게 살고 있는 여자. 

<위험한 관계>에서와 같이 이 경우 역시 모성의 상처에 원인을 제공한 자는 가장 가까운 사람인 남편이다.  남자와 여자의 만남이 얼마나 많은 변수를 지니고 있는지를 작가는 여러 편의 작품 속에서보여준다. 대등하고 독자적인 선택으로 만난 남자와 여자지만 결혼 후 자녀가 생기면서 서로의 입장이 판이하게 달라진다. 두 사람의 선택이 옳았다 하더라도 자녀에 대한 남자와 여자의 입장이 근본적으로 다른데, 그 결합이 원만하지 못한 경우는 최악의 파국으로 치닫고 결국 자녀로 인한 상처는 여자의 몫이 되는 현실이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끈질긴 모성은 어떤 난관도 뛰어 넘는다. 샐리 굿차일드의 경우도 그랬고 페트라 두스만의 경우도 그렇다. 남자는 떠나갔지만 아들은 되찾는다♣

 

 

********** 프롤로그 **********

 

 

  앞서 읽은 두 소설과는 달리 더글라스 케네디는 이 작품 속에서 유독 하고싶은 말이 많은 것 같다. 재미있는 읽을 거리를 뛰어넘어 인간 본연으로 돌아가, 삶을 전반적으로 되돌아보고 '순간의 누적이 인간을 만든다'는 보편적인 철학적 결론을 얻은 것일까? 소설의 앞 부분에서도 잠깐씩 언급되었고, 또 작품의 제목이 시사하는 바가 그렇다. 점점 폭과 깊이를 더해가는 작가의 다음 작품에 기대를 건다. 이미 출간된 다른 작품들(주로 여행기)도 틈을 내어 읽어보고 싶다. 여행기로서 최고 수준이라는 평을 받은 바 있으니까.